천재 호소인

그리 잘난 건 없다.

-나의 망상
재능이라고는 생각하기엔 내게 아무것도 없었다. 단지 조금 노력할 줄 아는 것? 내게는 그것밖에 없었다.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중학교 공부 정도는 쉽게 끝낼 수 있다. 사고력 없이 그냥 외우면 끝이었다. 그렇게 높은 내신을 따고서는 가볍게 명문고등학교에 합격! 여기까지 내 인생이 가볍게 풀린다고 생각했다. 이대로 가면 명문대에 가고 그러면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... 뭐 이런 뻔한 이야기 아니겠는가? 학교에서도 상위 50%에만 들어도 좋은 대학은 그냥 갈 수 있다는데 그 정도는 쉽다. 내가 평균보다 떨어질 리 없잖아? ㅋㅋ..... 이렇게 생각한 시점부터 내 인생은 망했을지도 모른다.

-현실 도피
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순간으로 돌아가고싶다. 아니 가야만 한다. 바로 명문고 내신 준비 학원을 10개 다닐 때부터였다. 부모님은 워낙 깐깐하시고 평균은 해야 한다는 주의가 있었다. 나는 그 페이스에 말려들어 결국 주 동안 학원 10개를 다니게 되었다. 수학, 영어부터 시작해서 물리, 화학, 생물, 지학, 정보, 국어...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양이었다. 처음에는 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다녔지만 사람의 생각과 몸은 다르다. 점점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게 매 순간 느껴졌다. 이거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. 그때부터 나한테 면제부를 주기 시작했다. "영어는 뭐... 안 해도 되겠지 해논게 있는데 말이야..." 씨발 그만둬! 영어공부를 하란 말이야!...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. 이 이야기 자체도 딸딸이 같은 느낌이다. 계속 자기 위로를 하고 있다. 마치 영어공부만 했으면 인생이 바뀔 것처럼.

-그래도
그래도 노는 것만 했던 건 아니다. 나는 무작정 노는 건 별로 안 좋아한다. 계획이 있어야 한다. 일단 중학교 때부터 꿈꿔오던 게임 제작을 하기로 마음먹었다. 나는 한 30%만 게임 제작에 투자하고 나머지 70%는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다고 생각해 수학과 기초적인 과학공부를 했다. 하지만 머지않아 70%, 30%가 되었고 결국에는 시험기간에만 공부하는 병신이 되었다. 그래도 나는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했다. 왜냐 그래 왔으니까? 적당히 치면 적당히 나올 줄 알았다. 첫 성적표를 받고 나는 방 속에 틀어박혀 흔히 말하는 히키코모리가 돼버렸다. 이때부터 학교도 안 나 가게 됐다. 그딴 시험이 나를 그렇게 낮게 평가하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. 그래도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인스타 팔로우도 많이 해놨다. 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꼭 인스타로 꼭 확인해 주겠어!... ㅋㅋㅋ 얼마나 성공하는지 보자고.... ㅋㅋㅋ

-인스타
인스타에는 다양한 소식들이 올라온다. 내가 조사한 결과 내 친구들은 하루 평균 20개 정도의 피드를 올린다. 조금 재미있는 사건이 있으면 모두 다 똑같은 사진을 올린다. 이런 게 재밌나? 그래도 뭐 나는 방구석에 앉아서 학교를 볼 수 있으니 좋다. 나도 인스타에 뭐 올려볼까. 흠... 좋아 내가 기르는 선인장 사진 올려보자! 선인장 사진을 올리니 5명 정도가 내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줬다. 키햐! 이때 상호작용의 재미를 알아버렸다. 내가 올린 피드에 반응이 온다는 짜릿한 재미가 있었다. 그래서 난 부계정을 만들어서 내 게임 제작 현황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. 이미 학교는 안나 간지 오래돼서 퇴학당했을 것 같다. 부모님의 울음소리는 헤드셋으로 막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.

-성공?
처음에는 반응이 별로 없었는데 게임 완성될 때까지 차근차근 올리니까 반응이 훅 올라와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채울 수 없는 팔로우 수를 달성했다. 게임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을 보는 게 쾌감이 있다나 뭐라나... 이해할 수 없지만 시장의 원리를 잘 파악했다는 거겠지? 역시 나야... 천재잖아? 그때부터 게임 제작에 몰두했다. 하루 14시간 진심으로 몰입하고 게임을 만들었다. 허리가 거의 무너질 것처럼 아프기도 했지만 그딴 건 이미 학교를 안 나간 시점부터 상관없었다. 나에겐 게임 제작밖에 남은 게 없었다. 부모님도 요즘 내게 잔소리 안 하고 내 꿈을 응원해준다. 나에게서 가능성을 느낀 건가? 뭐 딴사람의 인정 뭐가 필요한가 부모님한테 인정받으면 됐지.

-돈
나름의 돈을 벌었다.

-학위
그렇다. 나는 돈보다는 학위를 원했다. 돈만 많은 건 졸부 아닌가? 학위를 원했다. 그래서 결국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.

-호소인
호소인이라고 아는가? 최근 알게 된 단어인데 '딴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은 맞다고 호소하는' 약간 그런 걸 말하는 것 같다. 나는 천재호소인일 지도 모른다. 내가 노력하여 이룬 것을 내 자신이 그냥 이뤄낸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.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 난 열심히 공부했다. 하루 10시간씩 꾸준히 공부해 왔는데 뭐가 대충 했다는 거냐! 나는 내 노력을 감추고 나를 천재로 치켜세우고 싶었던 천재호소인이었다는 거다!

-이제는
이제 와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. 내 친구들은 이미 명문대에 입학해서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. 나는 꿈과 학업 속에서 아직도 방황 하고 있다. 만약 계속 게임을 제작하다면 당연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. 인스타에 신작 게임을 올리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다운로드하여줄 거고 그러면 충분히 먹고살만큼은 벌 수 있을 것이다. 근데 왠지 마음이 아프다. 계속 도망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. 그래서 시원하게 한번 부딪히고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. 그게 나의 천재 호소인으로써의 마지막 바람이다.